아니 에르노와 초면이 아니었다. 아니, 소설로는 초면이 맞지만 그녀와 처음 마주한 건 영화에서였다. 레벤느망. 임신 중절을 하기 위한 대학생의 이야기. 그때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충격을 받았다. 집착이니 광기니 이런 거 말고 정제된 날것(?)에서 충격을 받았다. 작가가 경험한 개인적인 일들을 마치 타인 바라보듯이 보고, 끝없이 과거에 대해 자기검열을 한다. 이것도 참 신선했는데, 간혹 그녀가 농담이라고 써놓은 건지, 아니면 나름 진지하게 쓴 문장인 건지 알 수 없는 두 문단들 때문에 엉덩이가 몇 번이고 허공에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 「책들을 펴면 그때의 꿈과 기다림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 같고, 그때의 나 열정을 다시 발견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돌연 미신적인 생각에 이끌려 책을 읽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안나 카레니나』같은 책은 왠지 불행의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는 읽어서는 안 될 비의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p.54)」, 「지난여름엔 파도바에서 성 안토니우스의 무덤 위에 소원을 적은 종이나 손수건을 올려놓고 기도하는 사람들 틈에 끼여 나도 이 사진을 놓고 그 사람이 돌아와주기를 간절히 기원했었다. (p.65)」 - 사실 이 문단들 말고도 만화적 표현으로 따지자면 말풍선에 느낌표가 가득하게 그려질 만한 몇 문장들이 있었다만... 어쨌든. 그녀를 알게 되어 굉장히 즐겁다.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행복의 크기를 불행에 견주어 보는 것도 나와 비슷해서 동질감이 느껴졌기도 했고, (아마 그녀의 MBTI에는 분명 N이 들어갈 것이다. F보다는 T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보다 여운이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