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이 독자에게로 넘어오는 사이 끝이 있다.”
12년차 문학 편집자이자 8년차 평론가인 박혜진 작가가 만난 작품(주로 책, 때로 영화)들 중 52편의 엔딩과 그 엔딩에 대한 단상을 엮어 모은 책의 소개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이 문장에 전적으로 공감하는데,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은 결코 독자인 내게로 넘어오지 못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었지만 끝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작품들도 내게로 넘어오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그 작품을 “정직하게 완주(p.325)”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광활한 마지막 문장의 묘미는 그냥 끝까지 읽은 사람이 아니라 정직하게 완주한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책들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뒷표지를 살살 쓰다듬어 보게 되기도 한다. 마지막 페이지를 여러 번 다시 읽고 되뇌고 또 다시 읽게 되는 책들도 있다.
김연수의 <일곱해의 마지막>이 그랬고,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그랬는데, 그랬던 책들을 이 책 안에서 만나게 될 때는, 반가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어 책장을 뒤적여 앞쪽으로 재배치해 놓는다.
그런가 하면 <이방인>과 <설국>은 ‘이렇게 끝났었나?’ 하면서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읽은 지 너무 오래된 탓이라고 할 수도 있고, 첫 문장이 지나치게 강렬해 상대적으로 덜 기억에 남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핑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여러 번 읽었고, 가장 좋아하는 책들 중 하나라고 늘 말하고 다니는데도 갑자기 만난 이방인의 끝이 생소했던 것은 어떤 말로도 핑계를 대기가 어렵다. 그저 정신 차리고 다시 읽어봐야지, 다짐하며 책장 수색에 들어갈 뿐.
전혀 모르는 책을 소개받기도 했다.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 (이건 영화도 있었다!)과 마르크 오제의 <나이 없는 시간>은 나의 무지 탓이겠지만 사실 작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일단 독서앱 위시리스트의 맨 꼭대기에 올려두었다. 보통은 누군가 안 읽은 책의 결말을 미리 알려주면 스포일러라고 욕을 했겠지만, 결말이 아닌 엔딩을 소개하는 이 책은 스포일이 아니라 길잡이가 되어줄 것을 확신하면서.
최근 읽은 박솔뫼의 <미래 산책 연습>에는 아무래도 오래 갈 것 같지 않은 지구의 끝과 아무래도 오래 살 것만 같은 자신의 끝을 동시에 준비하는 ‘최명환’이라는 등장인물이 나온다.
‘아니, 요즘 날씨 진짜 왜 이래?’가 입에서 절로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 다 이런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구의 변화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는 능력’이 필요하다지만, 이제는 조금 늙어버린 비혼주의자(나)에게는 ‘두려워하는 능력’ 없이도 두려워하라며 ‘고독사’에 대한 주입식 공포가 늘 따라붙는데, 지구의 엔딩과 나의 엔딩을 동시에 생각해 보려면 김기창의 <기후 변화 시대의 사랑>과 박지영의 <고독사 워크숍>을 동시에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니 이것들도 위시리스트에 올려두자.
너무 유명한 작품을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해 준 경우도 있었다. 고전을 다 좋아할 수는 없는 게 당연하지만, 왠지 고전이라고 하면 ‘나 그거 싫어, 재미없어, 왜 좋다는 건지 모르겠어!’ 라고 정직하게 내뱉어버리기가 민망해지기도 하는데, 그 엄청난 괴테의 작품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싫다!고 말할 수 있었던 단 한 작품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그 책은 나에게 “인격적으로 좀 문제가 있어 보이는 이기적이고 덜 자란 인간이 죄 없는 여자(그것도 유부녀)를 스토킹하다가 자살한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되는 것들, 해야 하는 일들 중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가장 슬프고 쓸쓸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작품을 “정신 나간 사랑”을 하는 젊은 ‘베르테르’가 아니라, “중심에서 밀려남”을 인정해야 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젊은’ 한 인간의 고뇌로 읽는다면 전혀 다른 모양일 수도 있겠구나, 아무튼 좋아하는 책은 아니니 이건 도서관에서 빌려서 다시 읽어야겠다.
작년 봄, 유방에 혹이 생겨 조직검사를 앞둔 시점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결과를 듣기까지 한 달 가까이, 나는 내 몸에 대해 알고자 평생 해왔던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가 뭘 했더라, 뭘 먹었더라, 잠을 얼마나 잤더라, 들여다보는 일부터 같은 경험을 가진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끝없이 찾아보고, 읽어보고, 저들과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어떤 다른 점이 있는지, 그들은 어떻게 했는지, 그래서 이겨냈는지 여전히 싸우는 중인지, 나는 뭘 해야 할지, 악성이면 그 다음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양성이면 앞으로 관리는 어떻게 할 건지..
그래서인지 “병든 사람만 책을 읽는다. (중략) 자신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알려 하고 타인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병든 사람만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방황한다.(p.112)”는 문장은 깨달음이 되기도 위로가 되기도 했다. 병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내 몸을 알고자 가장 많이 노력했던 것처럼, 나는 앞으로도 병든 사람처럼 책을 읽어야겠다. 병든 사람처럼 방황하며 타인을 알려 하고, 나를 알기 위해 방황해야겠다.
엔딩은 끝이 아니다.(p.154)
엔딩을 소개하는 이 책의 엔딩을 보고 난 뒤 잔뜩 늘어난 위시리스트를 보면 그 말은 절대적으로 사실이다. 책의 엔딩과 함께 독서 지옥이 시작될 것임을 예감한다. “작은 지옥”은 어디에나 있다(p.318)는데 이런 지옥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병든 사람처럼 읽기로 결심했으니까.
어떤 밤에는 문학만이 나를 살려두었고, 죽을 때까지 거기서 살아갈 힘을 얻어낼 것이라는 이 책의 엔딩 만큼은 그 마지막 한 마디의 무게를 온전히 가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의 제목 “이제 그것을 보았어”의 “그것”은 분명히 엔딩일 테지만 “이제”는 언제일까?라는 질문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읽고 나서 “이제”는 “정직하게 끝까지 읽었을 때”라는 답을 얻었고, 이 책을 정직하게 완주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