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요즘 산책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어서 읽게 된 책이다. 세상살이가 신산할 땐 신록이 창창한 거리를 걸으며 라일락도 보고 이팝나무도 보고 헐떡거리며 노즈워킹을 하는 개들도 보고 하는 게 나름의 휴식이 된다. 마치 개들의 노즈워킹처럼 소소하지만 풍성한 세상의 자극과 함께하는 산책은 자연히 사색을 불러오고, 사색은 몽상으로, 몽상은 망상으로 이어지는데…… 그런 잡념에 빠져드는 게 어디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것이 산책의 가장 큰 묘미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장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도 바로 그것을 담고 있다. 제목의 ‘몽상’은 원제의 ‘les rêveries’에서 왔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몽상, 공상, 망상, 숙고’ 등의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렇게 생각하면 원제의 단어 선택은 더없이 정확해 보인다.
“마침내 나는 이제 이 세상에서 나 자신 말고는 형제도, 이웃도, 친구도, 교제할 사람도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라고 말하는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들에게서, 또 모든 것에서 떨어져나온 나, 나 자신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 내게 남겨진 탐구의 주제다.” 실제로 이 책에 실린 열 번의 산책 동안 이어지는 몽상의 대상은 바로 그 자신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살아남은 문학 작품이 필연적으로 그러하듯, 그 자신에 대한 성찰은 인간 자체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고. 그 증거는 18세기 파리에서 살아간 그가 쓴 많은 상념들에 21세기의 서울에서 살아가는 내가 공감한다는 것이다. 물론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긴 하다. 이를테면 그가 산책 개에 부딪쳐 크게 다친 일(「두번째 산책」)이 프랑스 왕과 왕비의 귀에까지 들어간다든가 하는 부분……? (당시에도 엄청 유명했나보다……)
내가 특히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네번째 산책」에서 거짓말과 허구에 대해 생각하며 『고백록』을 쓸 때 솔직하려 하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고 주의했다고 쓴 부분이다. 겸손함은 태도이기도 하지만, 주의해야 유지할 수 있는 미덕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겸손함은 자신에 대한 거리감에서 오니, 겸손하려 노력하는 이의 글은 아무래도 믿을 만할 수밖에 없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 옛 성인들이 쓴 지고한 성찰서와 다른 점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자신을 치장하려 하지 않고, 약간의 위악을 덧붙이는 장치를 통해 더욱 진솔하게 자기 자신을 성찰한 결과라는 것. 「아홉번째 산책」에서는 행복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이 부분도 역시나 공감이 갔다. “행복이란 항구적인 상태로, 이 세상 사람을 위해 마련된 게 아닌 듯 보인다. 지상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어 변함없는 모습을 지니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고 “이 삶의 행복을 위한 우리의 모든 계획은 공상”이니 “정신이 만족하는 순간이 올 때 그 만족감을 만끽하자”는 것. 그러니 행복을 좇는 자여, 행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순간을 믿어라……
그런데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사색의 심연에 이르면 결국 하는 생각들이 다 비슷하다는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명상록』)나 톨스토이(『참회록』)나 루소나…… 그래서 다른 문학 작품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되는데, 그런 면에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글을 어떻게 썼을지도 궁금해진다. 산책을 하면서 글을 쓸 수는 없으니, 집으로 돌아와(또는 파리에 대한 나의 선입견에 의하면, 노천 카페에 앉아 종이를 펼쳐놓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또 한번의 사색을 거칠 수밖에 없었을 테니. 아마도 글쓰기는 그에게 또다른 방식의 산책이 아니었을까 싶다.